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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암상사와 문화운동시대

     

     

    춘암상사는 3.1독립운동 당시 48인의 한 사람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포덕 63년(1922) 의암성사가 환원하자, 교내의 모든일을 중의에 맡기고 정신적인 지도자로 남게 되었다.



    춘암상사의 이름은 박인호(朴寅浩)이다. 포덕 전 5년(1855) 2월 1일 충남 덕산군 장촌면 막동리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순박하며 원만한 춘암상사는 29세가 되던 포덕 24년에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이후 10년간 밤낮으로 의관을 벗지 않고 생선, 고기, 술, 담배 등을 끊고는 정성으로 수련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잠이 깊이 들까 염려하여 낫자루를 베고 잠시 눈을 부쳤다가는 깨어서 주문을 외웠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해월신사의 지도를 받아 공주 가섭사에 들어가 49일 수련을 하는 등 장차 지도자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동학혁명 당시에는 덕의대접주(德義大接主)로 충청도 일대의 동학군을 통솔하여 참가하였다.


    그 후 포덕 42년(1901)에는 경도주(敬道主)가 되었고, 교장(敎長), 중앙총부 고문, 금융관장(金融觀長), 경도사(敬道師) 등의 직책을 두루 지냈다. 포덕 48년(1907) 12월 10일 천도교의 차도주(次道主)가 되었다가 포덕 49년(1908) 1월 18일 대도주(大道主)의 종통(宗統)을 선수받아 천도교의 4세 대도주가 되었다.


    춘암상사는 대도주가 된 이후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도체제를 새롭게 갖추고, 교세 확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포덕 51년(1910), 우리 나라는 일제로부터 강점을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고, 이러한 아픔을 이겨내기 위하여 일제의 억압과 감시 속에서도 춘암상사는 의암성사의 뜻을 받들어 출판문화와 교육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중앙총부 부설로 당시로서는 최신형 인쇄소를 설치하여 천도교가 문화운동을 주도해 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한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을 인수하여 경영하는가 하면, 사회 성인교육의 일환으로 전국에 800여 개의 교리강습소를 설치 운영하여 민족 교육에 앞장섰다.


    춘암상사는 3·1 독립운동 당시 천도교의 중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민족 대표에서는 빠졌지만, 48인의 한 사람으로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포덕 63년(1922) 의암성사가 환원하자, 교내의 모든 일을 중의(衆議)에 맡기고 정신적인 지도자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일제가 만주를 침범하는 등 군국주의 통치가 심화되던 포덕 79년(1938), 지방의 교역자들을 불러 일제 패망을 기원하는 특별기도를 지시하였다. 이것이 곧 무인멸왜기도(戊寅滅倭祈禱)운동이다. 그 후 춘암상사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천도교를 지켜오다가, 포덕 81년(1940) 4월 3일 환원하였다. 향년 86세였다.


    이후 천도교는 춘암상사의 환원(還元)과 함께 그 간 논의되어 오던 중의제(衆議制)에 의하여 교령(敎領)을 선출하는 체제로 전환하여 3년마다 교령을 선출하여 천도교 교단의 행정적·정신적 지도자로 천도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러한 제도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어, 지금도 매 3년마다 교단의 대의원들이 모여 전국대회를 통하여 교령을 선출하고 교단의 모든 것을 위임하여 교단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